<나는 전설이다>를 본 후, 좀비 영화라는 인식이 꽉 박힌 <28일 후>를 드디어 보게 됐다.

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, 나는 좀비 영화를 무척 싫어한다.
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집요함에 질려서라고나 할까.
이런 인식이 박혀버린 건, 아주 옛날옛적에, 무덤에서, 또는 거리에서, 또는 살해 현장에서, 시체들이 마구 일어나 산자들을 공격하는 영화 때문이다.

이것들은 죽여도 죽여도 사지가 움직이는 한 계속 공격한다.
그것이 질려 버린 첫 번째 집요함이다.
죽여도 죽여도 계속 몰려오고 이미 죽었으니 죽지도 않는, 생각만 해도 멀미가 솟구치는 좀비들.
초기 디아블로(헬파이어)를 할 때였다. 열심히 노가다로 레벨 업 해서 상당한 양의 물약과 아이템을 구비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 후 헬로 간다. 그러나 죽여도 죽여도 지치지 않고 다시 공격하고 수를 더하던 몬스터들의, 그 수와 그 집요함에 질려서 내려갔다가 올라가기를 몇 번 반복한 후에야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있었다. (일단 소심해서) 그 음산한 배경음과 어두운 그래픽도 한몫한다. 쓸데없이 고전 게임 얘기가 나와버렸는데, 같은 맥락의 질림에 대한 감상이라고 해두자;;

두 팔을 뻗어 뒤뚱거리며 느릿느릿 움직이면서도 멈추질 않는다. 게다가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자기 팔다리가 덜렁거리는 데도 계속 움직인다. 눈깔이 눈구멍에서 빠져나오고, 코가 뭉그러지고, 머리칼이 빠지고, 옷은 입으나 벗으나 찢기고 삭고, 어쨌든 모든 게 너덜너덜한데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고약한 냄새까지 풍긴다. (그럴 것 같다) 그럼에도 그들은 무언가 갈구하듯 계속 산자들을 향해 공격한다. 마치 삶에 대한 집착으로 보인다.
그것이 질려버리는 두 번째 집요함이다.
삶이라는 건 산자만이 갈구할 수 있는 욕망이다. 기존에 내가 본 좀비 영화는 일단은 죽은 자들이다.
무엇이든 순환을 역행하는 건 질리게 한다. 물론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의미의 소망과 기원 자체는 순환의 역행이라 생각하지 않는다.

그런데 원인은 어쨌든 인간 때문이다.
인간의 '무엇'이라고 단정 짓지 않아도, 인간이 행했던, 행하는, 행할 악행이라는 건 무궁무진하다.
나도 물론 거기에 포함 된다. 간혹 아주 치가 떨릴 정도로 섬뜩하게 하는 '인간' 나를 포함 인간이 가진 욕망, 그것이 세 번째 질려버린 집요함이다.

이것이 지금껏 좀비 영화를 안 봤던 어설픈 이유다.
다 집어치우고, 실제 이유는 혐오감일지도 모르지--;;

어쨌든, 다시 영화로.

<나는 전설이다>를 본 후, 주변에서 <28일 후>를 적극 추천해줬다.
<28일 후>는 그전에도 여러 번 추천을 받은 영화였다.

두 영화를 본 추천인들의 반응은, <나는 전설이다>는 <28일 후>에 비해 별로라는 평이었다.
두 영화를 본 후 내 느낌은, 둘 다 비슷했다.
그리고 별로였던 영화였지만, 큰 줄거리로 봤을 때 <레지던트 이블>, <새벽의 저주>와도 유사했다.
그래서 이 영화들의 모티브라는 리차드 매드슨의 <나는 전설이다>를 샀다.

<28일 후>를 보며, 그들은 다행히 혼자는 아니구나, 하는 생각에 네빌이 측은했다.
<28일 후>는 특별한 정보도 없고 기술도 없는 민간인들이 감염으로 다수가 된 변종들과 맞서며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, 폭력과 욕구에 초점을 맞춘 거라면, <나는 전설이다>는 혼자 남은 인간(그러나 <28일 후>와는 달리 정보와 기술을 지녔다)이 변종들과 더불어 극도의 고독과 싸워야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닌가 싶다.
그러다 보니, 이 영화는 어디에 초점을 맞췄느냐의 차이만 느껴졌다고나 할까.

나는 둘 다 괜찮았다.
공통적으로, 두 영화에 나오는 변종들은 일단 기존 좀비들과 달리 무지 빠르고 상당히 맹렬하게 공격한다. 이점은 기존 좀비 영화에서 느꼈던 아둔함과 느림에 의한 질림을 극복하게 해주며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.
<28일 후>는 미국 영화에서 보이는 기독교적(윤리적) 교시가 덜 하다고나 할까. 유럽 영화들의 이런 부분은 참 신선하고 좋다. <파니 핑크>나, <퍼니 게임> 같은 영화처럼. 물론 데미지가 큰 경우는 있지만...
예를 들어, 감염 사실을 아는 순간 무자비하게 동료를 도륙하고, 감염된 자라면 그것이 어린 소년일지라도 방망이로 내쳐버렸던 점. 또는 군인들의 집단 히스테릭 같은 것.
<나는 전설이다>는 워낙 헐리우드 영화에 윌 스미스 주연이라 어느 정도 '헐리우드'적일 거라 예상했던 반면, 의외로 좀 덜했다는 것. 변종들의 과도한 그래픽이 좀 거시기 하긴 했다. 이런 건 아날로그 방식이 훨씬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 약간.
어쨌든, 두 영화 모두, 결국 인간은 승리하고, 다시 개척할 것이며, 다시 번식하고, 번성할 거라는, 결국 인류 승리다.

리처드 매드슨의 <나는 전설이다>는 본작도 본작이지만 같이 실린 단편들도 무지 땡긴다.
리처드 매드슨이 환상특급과 X파일의 바탕이 되거나 원작자였다는 얘기를 들은 후 더욱 기대가 된다.
하지만, 유감스럽게도 황금가지다! 똥 밟았다.
아직 읽지 않아 번역이 어떨지는 모르겠고, 읽은 후 다시 한 번 씹어 주리라!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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